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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로자 형사소송에 대한 몇 가지 알림과 간략한 소회입니다


(위 제목으로 개인 페이스북 계정에 2016년 8월 12일에 올린 글입니다. 법정에 제출한 두 번째 탄원서의 내용이 상당 부분 올라와 있습니다)




2016년 8월 12일인 오늘은 법원에서 제 형사소송에 대한 선고 결과를 발표하는 날입니다. 2015년 6월 19일 한 여성의 폭로 이후 있었던 일들에 대한 법정 공방에 대한 결산입니다. 상황은 줄곧 제게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판결문 내용은 받아봐야 알겠습니다만, 이 결말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씀하실 분들을 위해 실제로 벌어진 상황을 요약해드리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저는 폭로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습니다. 그리하여 허위사실로 받아들여질 것인지 사실적시로 받아들여질 것인지가 제 입장에선 중요했습니다.


2) 저는 경찰 조사를 두 번 받았습니다. 그리고 검찰에선 저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폭로자와 저의 경찰 진술에는 상호 주장만 있었을 뿐이며, 폭로자 역시 아무런 증거를 제시한 바 없습니다. 심지어 폭로자가 동원한 단 한 명의 증인은 저와 헤어진 후 알게 된 사람입니다(진술 내용 열람을 허가받지 못해 왜 그 사람이 등장했는지조차 모르겠습니다). 본인이 폭로문에서 천명했던 ‘여러 명의 증인’이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검경의 조사는 폭로자의 주장이 사실임을 입증한 것이 아니며, 다만 폭로자를 처벌하겠다는 취지로 사실을 밝힌 부분에 대해서만 문제삼은 것이었습니다. 경찰은 조사 과정에서 제게 “서로 말이 엇갈리는데 우리가 무슨 수로 검증하느냐”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3) 사법기관의 입장에선 제가 일부 폭력을 시인한 부분이 있고, 제가 허위라고 고발한 부분에 대해선 허위임을 입증할 자료가 별도로 없었기 때문에, 폭로자를 ‘사실적시로 인한 명예훼손’으로 처벌하는 것이 더 간편하게 생각되었다고 판단합니다. 


4) 개인적으로는 예전에도 조금씩 고민한 바 있던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취지와 작동방식에 대해 여러 가지 난감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맹목적인 폐지론에 부화뇌동하지는 않는 입장입니다만,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깊이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별개로 각자 사정은 다르겠지만 ‘사실적시 명예훼손 유죄’로 결론이 난 상황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세태가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5) 이하 소회는 제가 이 재판에 제출한 두 번째 탄원서의 (제가 아닌 다른 이의 정보가 들어 있어 공개되기 민감한 일부 부분을 생략한) 상당 내용으로 대신하겠습니다.




탄원서


존경하는 재판장님, 고소인인 저는 지난 두 번의 공판에 묵묵히 참석했습니다. 첫 번째 공판에 참석한 후 장문의 탄원서를 제출했습니다. 사건 발생 후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누구를 상대로도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구구절절한 사연을 적어 보내느라 너무 길어졌습니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서 저 스스로도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번에는 짧게만 쓰겠습니다.


1. 인정한 제 잘못에 대해선 반성하며, 피의자의 엄벌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날짜도 잊지 못할 2015년 6월 19일 피고인의 폭로 직후 저는 폭로 내용 중 극히 일부를 인정하고 공개적으로 사과했습니다. “데이트 폭력을 행사한 적이 있”다고 하였고, “피해자에 대해 어린 나이에 빈곤하고 우울한 저를 만나 겪지 않아도 될 심적 고생을 했다고 여겨 미안한 마음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헤어진 후에도 관계적인 면에서나 물질적인 면에서나 도움을 주려고 애썼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20150620 본인의 첫 번째 사과문). 이것은 인지상정의 심정을 고백한 것이었으며,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제가 그렇게 행동했기 때문에 대중은 피고인의 폭로가 거의 전적으로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언론에도 그러한 식으로 보도가 났습니다. 이전 탄원서에서 제가 재판장님께 적어 올린 그런 구체적인 사연들은 불특정다수의 사람들에게 알리기는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이름을 내걸고 글을 쓰던 사회적 삶이 파산했고, 인간관계에서 많은 지인들이 떨어져나갔으며, 프리랜서 일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면서 한 업종에서 십 여 년을 들인 노력이 무(無)화되어 이십대 초반 사회초년생의 처지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본인이 한 일보다 훨씬 더한 사회적 처벌을 받고 있다 느낀 결과 처음에 느꼈던 반성의 마음은 희미해지고 억울함의 원념만 커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분노와 우울을 조절할 수 없어 지난 일 년 간 우울증 치료를 받다 말다 했고 알콜중독증 치료도 받았습니다.


해명의 공간이 열리지 않았기에 반성의 공간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제 잘못을 허심탄회하게 얘기할 만한 공간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사람들은 사실상 제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누구와도 연락하지 못하는 상태가 적절한 징벌이라고 생각하는 듯했습니다. 제 안부를 묻는 지인들조차 남들 눈에 띄는 것이 두려워 ‘내가 연락했다고 누구에게 알리지 마라’고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상황에 분개한 친구들과 몰래 찾아오는 지인들과 함께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 제 상황은 바뀌지 않았지만 분노와 우울의 세월은 과거의 일로 떨쳐 보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 자신에 대해서도 반성하고 있습니다. 상호폭행이었다 해도 나이가 더 많고 신체적으로 더 건장한 남성이었던 제 잘못이 크다고 그때도 생각했습니다. 피고인이 왜 그런 폭로를 했는지에 대해, 그리고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쉽게 믿었는지에 대해서도, 평소 제 삶의 태도에 문제가 있어서 그랬을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중략)


제 희망과는 별개로, 이 소송에서 제가 새로이 밝혀낼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없습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적용되느냐 마느냐, 적용된다면 형량이 얼마냐의 문제만 남았습니다. 사실상 제 명예회복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저는 피고인이 무죄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건이 피고인에게 엄벌이 필요한 일이라 생각하지도 않으며, 그러한 것을 원하지도 않습니다.


2. 제가 소송을 한 이유는 소명을 위해서였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께서 고소인이 소송을 한 취지를 이해해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저는 애초부터 피고인을 강하게 처벌하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앞서 고백했듯 저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을뿐더러, 그런다고 해서 제 명예가 회복될 수 있는 일도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피고인의 자산이나 소득이 전무하다는 것이 쉽게 추정되었기 때문에, 민사소송을 통해 제 피해를 보전받을 수 있을 거란 희망도 전혀 가질 수 없었습니다.


저는 피고인의 일방적인 주장을 대중과 언론이 받아들이는 현실에서 사실관계의 소명을 바라고 소송을 제기한 것입니다. 소송을 하기 전엔 피고인과 저 자신이 소속되었던 노동당 당기위원회에 저 자신을 제소하거나, 여성단체에 문의를 하는 방법 역시 검토했습니다. 애초부터 피고인 처벌이 아닌 사실관계의 소명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법들론 피고인이 출석과 진술을 거부할 경우 해답을 찾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법의 힘을 빌리게 되었습니다.


피고인의 주장은 과거 만 3년 이상 연애했던 제게 상습구타를 당했다는 것으로, 스스로 물증을 제시하지 않은 상황에서 제가 그것에 대해 반박하는 물증을 제시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피고인이 저와 연애하던 당시부터 상습구타에 관한 증언을 주변에 했다는 주장은 거짓이라 보았기 때문에, 피고인의 진술을 들었다는 주변인들을 조사해보면 진술의 비일관적인 부분이 드러날 수도 있겠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졌습니다.


연애를 했던 그 3년 동안 재수학원(2009년의 몇 달), 지방선거 선본(2010년의 몇 달)을 오가고 노동당 대의원(2011년)으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부모님집과 제 집을 자유로이 오가고 친구들과 교류도 많았던 피의자가 그 긴 기간 동안 상습구타당한 정황을 누구에게도 포착당하지 않았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중략)


저는 제가 겪은 고통과 이 사건이 보도된 사회적 파장을 보고 오판하여, 검경이 이 건을 마치 TV뉴스에서 보는 뇌물수수 건처럼 엄정하게 다뤄줄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서로의 어긋난 진술을 확인하는 것에 그침으로써, 여러 사람에게 민폐를 끼친 꼴이 되었습니다. 이 상황 역시 저의 부족함 탓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3. 밝히지 못한 사실관계는 그대로 남겨주시어, 향후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존경하는 재판장님, 제 소송의 취지를 생각하시어 한 가지의 부탁만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소송과 재판의 결과는 피고인의 주장이 ‘사실임을 입증한 것’이 아니라 ‘허위임을 밝혀내지 못한 상태에서 사실에 해당한 것만 다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의 진술이 어긋났고 가릴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에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처벌하게 되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공판에서 재판장님이 피고인의 무죄주장에 대해 ‘서로 주장하는 사실관계가 많이 다르다’는 취지의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고 무척 기뻤습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법의 언어로 ‘사실적시 명예훼손’이란 결론이 나올 경우 공권력이 조사결과 피고인의 주장을 사실로 인정했다고 착각할 소지가 너무나 크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재판의 상황이 가닥이 잡힌 이후 피고인은 저에 대한 폭로를 시작했던 그 트위터 계정에서 자신의 재판 진행 상황을 제 이름을 적시하지 않고 간략히 적음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한 착각을 하도록 유도했습니다(자료 첨부). 그 트윗 내용을 보고 다른 사람들은 이미 제가 소송을 걸었지만 피고인의 주장이 진실임이 입증되었다는 식으로 반응하고 있습니다(자료 첨부). 폭로 당시 150여건의 기사 보도가 나오는 것을 본 제 입장으로서는, 판결문을 개략적으로 요약한 기사가 날 경우 혹시라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무척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피고인의 폭로는 제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생계가 송두리째 흔들리면서 크나큰 경제적 손해를 입었고, 인간관계에서 오해가 발행했습니다. 이 두 가지 손해를 감내하기가 힘들었기에 막대한 정신적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저는 그러한 피해를 조금이라도 복구하기 위해 소송을 걸었는데, 그 결과로 인해 더 큰 피해를 당할지도 모르는 암담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저는 지금 사람들이 제 말을 진실이라 받아들여 줄 거라고는 기대할 수 없는 입장입니다. 그저 사람들이 이 건에 대해 사실관계의 다툼의 여지가 있다는 것만을 알아준다면 더 말할 나위 없이 고마운 상황입니다. 피고인이 사실적시 명예훼손으로 처벌받는 결론 자체에 제가 항변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 궁박한 처지와 피해자를 구제하려는 법의 취지를 감안해서, 이 재판의 결론은 피고인의 주장이 전부 사실임을 공표하는 것은 아니라는 요지의 부연설명을 간략하게라도 넣어주셨으면 합니다.


지금의 저로서는 이 재판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이 그것 밖에 없습니다. 재판장님의 사려가, 한 사람이 향후의 삶을 살아나가는데 크나큰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고려해주시길 간곡하게 부탁드립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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